[영화 리뷰]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 빈 공간에 햇살이 비칠 수 있도록 <영주>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의 빈자리 다공간에 햇빛이 비치듯 3.55스포일러가 많은 영화 영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아니라고 알지만 현실보다 더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난 이런 영화를 볼 수 없어. 현실도 녹록지 않은데 그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스크린 앞에서 마주해야 하는가. 스트레스를 날리고 상큼한 액션과 뜨거운 사랑으로 마음을 채워도 좋을 텐데. 사회고발류 영화는 폭력적인 장면 없이도 학대받는 듯한 등장인물을 보고 일부러 외면하려는 현실로 이입하게 된다. 거기에 치유물이 아닌 이상 답답한 마음이 크지만 실컷 울 수도 없다. 배우들은 얼마나 지독한가. <영주>의 주인공 김향기씨를 짚어봤다. 김향기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내가 본 작품은 <마음이>, <우아한 거짓말>, <눈길>, <영주> 등 네 작품과 <신과 함께> 시리즈이다. 하느님과 함께 필모를 자세히 보면 비관적인 처지에 놓인 인물들이 참 많다.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인데 이런 역을 맡으면서 혹시 속상할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영주는 사회고발 영화로서 다소 힘이 약한 작품 같다. 당연히 뭘 고발하려는 건 아니니까. 특정 사건을 토대로 하기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탓인지 정말 우울하고 상처받은 인간극장을 보는 듯했다. 처음엔 암울했고 덩그러니 놓인 영주 남매를 보며 안타까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런 영화는 잘 볼 수 없지만 연출면에 몰입도가 좀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촬영 기법을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상문과 향숙의 조건 없는 따뜻함에 위로받고 의지하게 되는 영주를 보면서 영화의 결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영주는 사실을 말하게 될까. 아니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되어 갈등이 생기는지. 영주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그 사람 언니가 누구 딸인지 알아?그 후 몰입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영화를 주의 깊게 보려고 노력했다. 영주가 스스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 없이 서로가 위로하는 결말이었다고 해도 나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비극도 희극도 될 수 없는 현실로 등장인물을 모두 추방한다. 마치 한순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죄의식은 씻을 수 없게.영주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받은 마음과 죄의식을 갖고 산다.영주 아주머니는 혈육인 조카를 아끼다가 결국 재정적 어려움과 철없는 남매에게 싫증을 느껴 인연을 끊는다. 하지만 그게 더 큰 죄로 남아 결국 다시 조카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주와 영인은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과 원한 속에서 살아간다. 영인은 점점 일그러져 죄를 짓고 부모를 죽인 상문과 향숙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을 위해 가해자들에게 물어서라도, 자신의 삶을 포기해서라도 영인을 지키려는 영주에게 죄의식을 갖고 반항심리를 더욱 키워간다. 영주도 가해자들을 원망하고 복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이들에게서 부모에게 받아야 할 따스함을 느끼며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상문과 향숙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아들 승일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고달픈 삶을 산다.
과실치사로 합의금도 참새의 피만큼 받았다는 얘기와 영주의 집과 비교되는 단독주택에 산다는 점에서 비로소 상문과 향숙이 나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운영하는 떡집은 불신 속의 다소 엉뚱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돈 찾아갈 곳이 없어 결국 상문을 찾아가려던 상황 속의 괴리감이 극대화된다. 영주는 떡집 알바에 들어가 돈을 훔치지만 오히려 향숙은 영주를 용서하고 뒷바라지를 한다. 이상하게도 바뀐 영주의 행동이 그들을 점점 의심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떡집은 담배나 술, 어둠이 아니라 미소와 웃음이 남아있는 따뜻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이 편견처럼 작용했지만 그 생각을 지워 영주의 마음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영인은 관객 입장에서 영주를 바라보는 입이 되어주지만 관객보다 한 박자 느리다. 이미 어머니 옷 대신 향숙이가 사준 옷을 입고 그들을 의지하기 시작한 영인은 나중에 묻는다.엄마 옷 왜 이래?영주는 이미 상문과 향숙을 부모처럼 느끼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 이후 의지할 곳 없이 스스로 기둥이 돼야 했던 인생에 당신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영정과의 말다툼에서 부모를 원망하는 대사가 참 섭섭했어요. 그것이 바로 영주가 꼭 숨겨온 죄의식이자 상처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주는 고해성사를 하듯 향숙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사실을 말한다.사실을 밝힌 후 상문과 향숙은 영주에 잠자리를 제공하였으며, 영주에 대해서도 보다 따뜻하게 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주는 영국인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네가 틀렸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영주는 무조건 아끼고 사랑해주는 두 사람을 부모처럼 생각했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영주는 더 이상 그들의 딸이 될 수 없었다. 이모에게 자신이 어른이라며 반항한 것은 이모가 이들을 돕는 일이 죄의식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상문과 향숙은 그러지 않았고, 영주는 그런 이들에게 의지하였다. 하지만 이제 더 큰 죄의식을 영주에게 투영하고 그 죄를 평생 안고 살아가기 위한 책임감으로 영주를 대할 작정이다. 더 이상 영주는 딸이 될 수 없다. 친아들이었던 승일의 침대에 향숙이가 해준 머리끈을 묶고 향숙이가 사준 옷을 벗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 기댈 곳이 없어졌어 은주는 홀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서로 돕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악인이나 선인으로 아무도 특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죄짓고 상처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영주가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상문과 향숙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따뜻한 빛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실컷 울고 나면 해가 뜨고 세상이 시작되는 마지막 장면처럼.


